2022. 5. 23.
ㄱ.

최근 대학에서 이성이나 자본주의 등 근본적인 관념을 되짚으며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재정의할 수 있는 활동을 주로 이루는 수업을 청강했다. 대주제의 막바지마다 토론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성’ 부문에서의 토론 시간에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미물이거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배경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었기 때문에 발화점이 평면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그리고 그 토론이 있고 나서 비교적 새로운 관점을 밝혀낼 수 있었다. 꽤 발칙한 의견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결론적으로 나는 인간이 그 어느 ‘하등생물’과 전혀 다른 점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점을 먼저 짚는 것이 강의의 취지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길이 될 듯하다. 이 문서의 내용은 이미 타인이 다루었거나 언제든지 내릴 수 있는 결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토론에서도 그랬듯 담론을 나눌 때 또는 의견을 내세워야 할 때 우리는 사람 이외의 종을 모두 개혁되지 않은 미개한 개체로 간주하곤 한다. 아주 대표적이고 간단한 예시로, 동물은 본능적인 생활을 하나 사람은 참고 절제할 수 있는 지성인임을 주장하는 발언이 그러하다. 이 의견에서 밝힐 수 있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동물은 본능을 억제할 수 없다
사람은 본능을 억제할 수 있다
본능을 억제할 수 있으면 지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과 타종을 갈라서 대립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인간과 타종의 차이점을 조화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기엔 다소 어려운 맥락과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우열을 매기는 결과가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제가 주어진다면 항상 그 문제를 문제 삼고 스스로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동물에게 정말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에게 가치판단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가. 겨우 본능을 억제하는 것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수 있는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할수 있느냐’하는 의문에는 좀 더 고차원적인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 한다는 관점을 비틀자.
나는 만물의 현상을 호불호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고 여긴다. 단순하게, 밥을 먹으면 포만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음식 섭취는 인간에게 좋은 행위이다. 시간을 인지하면 보다 더 체계적인 삶을 살 수 있고 비약적이게 효율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으므로 시계는 인간에게 좋은 물건이다. 항공기와 선박을 통해 더 넓은 세계로 나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지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이동수단은 인간에게 매우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 그리고 이러한 호불호적 작용은 비인간의 개체에서도 나타난다. 식물이 해를 따라 기우는 것, 바이러스의 생존전략인 전염 등과 같이 기타 모든 현상의 근본적인 답은 모두 최대한의 ‘좋은 방향’을 추구하고자 할 때 보이는 양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심에 ‘생존본능’이라는 삶의 기본 전제가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살기 위한 노력이 그들의 행동 양상으로 빚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즉, 나는 인간의 이성적이라고들 하는 행위의 뿌리도 바로 그 생존본능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내용에 따라서 본능과 이성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 같은 것이 아닌, 본능의 하위 요소가 이성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간은 상어나 코뿔소와 달리 매우 연약한 신체를 가졌고 맹수에게 사냥당하기 쉬운 개체이다. 그런 인간이 먹이사슬에서 살아남고 보란 듯이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까닭은 단연 이성의 작용일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인간 외 종에게도 이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하고 싶다. 생존을 위해 선택한 수단인 이성 그 자체가 이 종족의 본능이지는 않은지를 생각해야 할 타이밍이다. 인간이 띠는 행동 양상은 다른 모든 타종이 가질 수 있는 성질이다. 거기서 인간이 다른 점은 조금 더 복잡한 원리를 이해하고 해낼 수 있다는 점뿐이다. 우리는 이성을 기준으로 두고 판단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어야 하고, 그러면 말끔한 해답을 찾는 데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것이다.